2024년 3월 회고
2024 TNT 참가신청
드디어 신청서 접수가 시작되었다. 신청서도 썼고 지금은 SPI(일종의 시험) 일정을 잡기위해 기다리고 있다. 다음주부터는 연습한거 녹음하고 피드백 받는 훈련도 해보려한다.
신청서를 쓰는데 레퍼런스가 두 명 필요한게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의 동기면담 수준을 확인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한다고. 다행히도 훈련할때 도움을 주셨던 분이 MINT 회원이셔서 그분에게 도움을 구해 조건을 채울 수 있었다. 이미 SPI 자체가 꽤 난이도 높은 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지원하는거 자체를 어렵게 만든건 어떤 이유일지 궁금하다.
또 한가지 SPI에서 흥미로운 점은, 면담을 부호화 하고 난 뒤에 나의 회고를 제출해야 최종적인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피드백으로부터 어떤 배움을 얻을 수 있는지가 중요한 역량으로 다루어지는 느낌이다.
말로는 부족하다
대화를 잘 하는 훈련을 할수록 말이 가진 한계도 잘 느끼게 된다. 우리가 하는 말은 잘못 표현될, 잘못 해석될, 그리고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다고 봐야할것 같다.
조직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말과 실제로 원하는 것, 그래서 실제로 하는 행동이 일치하지 않다는 것은 이제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다. 게리 클라인은 많은 조직이 통찰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통찰의 증가보다는 오류의 감소에 기여하는 행동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제품을 만들때에도 마찬가지다. "우리 제품에서 A가 되면 좋겠어요." "이러저러하면 A인 거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며칠지나서 다시 모여 만든걸 보여주면 이런 반응이 돌아온다. "어라? 제가 말한건 이게 아닌데요."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을 때에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옆에서 동료가 잘 안 풀리는 일로 머리를 싸메고 있어서 이렇게 말해준다. "머리가 복잡할 땐 산책하고 오면 좋아요." 동료는 고맙다고 하고 산책을 갔다온 뒤 산책의 효과가 아주 좋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음주에 또 똑같이 책상에서 머리를 싸메고 있는 동료를 보게 된다.
이 일화들은 모두 말이 가진 어떤 한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오버커뮤니케이션도 섣부른 최적화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대화의 한계를 다양한 전략을 함께 씀으로써 보완하는게 더 쉽다고 생각한다.
요즘 제품개발의 측면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는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를 다같이 보는것'을 제외한 다른 어떠한 판단도 부차적이라는 것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를 최대한 빨리 보고 거기서 피드백을 얻는 것이 '완벽한' 기획과 디자인과 설계를 하는 것보다 잘못된 의사결정을 막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되는것 같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가 질 낮은 대화의 변명으로 쓰여서는 안되겠지만.
번역서의 함정
앞으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번역서는 안 읽게 될거같다.
올해 초에 버지니아 사티어의 The New Peoplemaking이 새롭게 번역 출간되었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의사소통에 대해서 사티어의 책으로부터 많이 배웠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고 몇몇 주변 사람들에게도 추천했다.
나는 원서를 갖고 있었는데, 우연히 번역서를 잠시 빌릴 수 있어서 한번 펼쳐봤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원서랑 비교하고 깜짝 놀랐다. 오역이 너무 심하고 심지어 문장이 통째로 사라지거나 여러 문단이 편집되기까지 했다. 도저히 읽으라고 추천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이런 고전이 이렇게 번역되어서 베스트셀러가 된다는게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이 역자가 내가 최근에 감명깊게 읽었던 읽었던 제니퍼 모스의 Burnout Epidemic도 번역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더 놀랐다. 혹시 저 책도 이런식으로 번역되었을지 확인하기 무서울 지경이었다.
원래도 원서를 선호하긴 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명확하게 원서를 우선하게 되었다. LLM의 시대에 이런 리스크가 아직 존재한다는게 믿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