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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식 - 생각과 행동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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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만년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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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 나는 연필을 칼로 깎아 썼다. 취미로 그림 그릴 때 뿐만 아니라 모든 필기를 다 연필로 했다. 돌이켜보면 정말 이상한 집착이었다. 연필 그 자체에 어떤 기능상의 이점은 없었으니까. 그 때 연필을 깎는 일은 일종의 의식같은 게 아니었던가가 싶다. 모종의 명상이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필기를 타이핑으로 전환하면서 연필과 작별했다.

그리고 몇년 전 부터 다시 일기를 손으로 쓰기 시작했다. 계기가 뭐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다시 손으로 글을 쓰기 위해 필기구가 필요했고, 이번에도 뭔가 집착스러운 걸 쓰고 싶었던건지 만년필을 택했다.

만년필은 소유권을 무척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필기구라는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가격대와 상관없이 일단 가지고 있기만 하면 계속 쓸 수 있으므로, 잠시 머물다 떠다는 다른 필기구와는 완전히 다른 인식을 가지게 된다. 가격이 싼 만년필을 쓰다가 쉽게 고장나서 똑같은 모델을 다시 살 때 그렇게 마음이 불편할 수가 없다. 돈이 아까운게 아니라 그냥 옛 만년필에 대한 애착때문이다.

일기 노트를 항상 빨간색으로 고른다는 것도 이상한 집착이다. 이것은 그 이유를 기억하는데, 어릴 때 일기를 다른 노트와 구분하기 위해 지금까지 쓴 적 없는 색을 택했던 것이다. 지금은 구분할 다른 노트가 없기 때문에 별 상관 없지만. 거기에 더해서 일기끼리의 구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매번 다른 브랜드를 산다. 아마 이렇게 쓰다보면 세상의 모든 빨간 노트를 써보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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